책리뷰라고 썼지만, 그냥 떠오르는 생각들의 주저리주저리
저자 | 책 이름 | 시작 일 | 완독 일 |
---|---|---|---|
폴 블룸 | 『공감의 배신』 | 23/02/06 | 23/02/13 |
간략한 소감
예전에 읽었던 『냉정한 이타주의자』와 같은 류의 주장을 하고 있는 책 같다.
뜨거운 가슴보다는 차가운 머리를 중요시하는 가치관을 배울 수 있다.
공감이 무조건 선할 것이라는 생각에 큰 돌을 던지는 책이기 때문에, 생각의 확장을 위해서 한 번쯤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정책수립등 공적인 영역에서 공감이 안좋은 영향력을 끼친다는 주장에는 매우 동의하지만, 개인적인 관계에서도 그렇다는 주장에는 아직 동의하기 힘들다.
내가 꼽은 한 구 절
공감은 지금 여기 있는 특정 인물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스포트라이트다.
공감은 그 사람들에게 더 마음을 쓰게 하지만, 그런 행동이 야기하는 장기적인 결과에는 둔감해지게 하고, 우리가 공감하지 않거나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은 보지 못하게 한다.
어떤 이야기를 하는 책인가?
《알쓸인잡》에서 김영하 작가님이 언급하신 것을 듣고 홀랑 구매해서 읽게 되었다. 처음 생각했던 것과 달리 내용이 어려워서 쉽게 읽어나가지 못했다. 철학보다는 심리학에 더 내용이 치중되어 있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공감은 스포트라이트이다.” 저자가 하고싶은 말을 한 문장으로 함축하면 딱 이것일 것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공감할 때, 그 대상에만 너무 집중하게되는 나머지 그 주위를 살피지 못하게한다. 그렇기 때문에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을 수반하기도 한다. (저자는 더 강력하게, 부작용이 훨씬 크다!! 라고 말한다.)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공감이 안 좋은가?
책의 시작은 미국에서 일어났던 총기난사 사건을 예로 들며 시작한다. 총기난사 사건으로 초등학생들과 교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우리나라에도 뉴스로 보도된 적 있는 사건이고, 굉장히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해당 사건이 보도된 이후 해당 지역으로 위로와 구호물품들이 보내졌고, 주변 지역 부모들도 자신의 아이에게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뉴스를 접한 사람들이 해당 사건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공감이 어디가 안 좋다는 것인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가??
- 총기난사가 일어난 지역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지역이었다. 오히려 지원을 받아야 할 도시에서 부유한 지역으로 구호물자가 보내졌고, 해당 물자들은 창고에 쌓여 쓰레기가 되었다.
- 미국에서 일 년동안 발생하는 사망자 중 총기난사는 1%의 비중도 차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망 원인에는 사람들이 공감하지 않고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1%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고해서 총기난사 사건이 비극적이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충분히 비극적이다. 하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이것이다. “공감은 편향을 반영해서, 특정 사건에만 집중하게 만든다”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수백만의 죽음은 통계일 뿐
- 스탈린 -
우리나라의 상황에선?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에는 어떤 상황이 있을까 생각을 해봤다. 감히 언급하기 힘든 이야기이긴 하지만, 세월호 사건과 이태원 참사가 떠올랐다.
두 사건 모두 엄청난 비극이었다. 나도 굉장히 참담했고 애도를 표했던 사건들이었다. 두 사건이 비극이 아니라고 말 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비극이고, 우리는 그런 사건들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그런데 왜 여기에만?
고백하자면, 두 사건이 있었을 때 내가 떠올렸던 질문이다. 왜 우리는 그 사건에만 그렇게 안타까워하고 관심을 가지는걸까? 아마 평소에 접할 수 없는 비극이라서 그럴 것이다. 놀랍게도 우리는 꾸준히 오랜기간동안 많은 사람이 죽는 사건보다는 단기간에 특정한 사람들이 죽는 사건에 더 크게 반응하고 공감한다. 후자의 사건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때, 우리는 전자의 사람들을 돌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박화영》, 《어른들은 몰라요》라는 영화를 보았는가? 《브로커》, 《다음 소희》라는 영화는 보았는가? 우리는 이렇게 특별하지 않은, 만연한 비극에는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공감하고있는가?
내가 영화를 보고 저 비극들에 조금이나마 공감하게 된 것은, 영화가 통계를 비극의 영역으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영화가 스포트라이트의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 한 해 청소년 자살로 얼마나 많은 청소년들이 죽는지 알고 있나?
- 청소년뿐 아니라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나?
- 고독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 학교폭력의 피해자는 얼마나 많은지 알고있나?
나도 모른다, 영화든 드라마든 어떠한 방법으로든 통계에서 비극의 영역으로 끌어져 나와져야만 관심의 영역이 된다.
공감은 특정 대상을 비추는 역할을 하지만, 다른 대상을 가리는 역할도 한다. 특정 대상에 공감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 다른 대상에 눈길을 주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신의 공감은 모든 영역,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주어질 것이어서 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다.)
공감은 편향을 반영한다.
내가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한 (그리고 이해하지 못한) 주장들도 많이 실려있다. 대표적으로 공감의 편향성이다. 간략하게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백인은 백인에게 더 공감한다
- 우리는 주위 사람에게 더 공감한다
- 나와 비슷한 사람일 수록 더 공감한다
그래서 공감하지 말라는 말인가?
저자의 최종 목표는, 그렇다.
공감을 동원하지 않고도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할 수 있고, 도울 수 있다. 관련 예시를 책에서 굉장히 많이 제시한다. 저자는 궁극적으로는 공감을 완전히 배제하고도 충분히 이타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제시한다.
개인적으로는 얼마나 가능할지 모르겠다. 다만, 정책수립등의 과정에서는 그래야한다고 생각한다. 공리주의적인 발상이지만, 정책은 가슴이아닌 숫자에 의해 수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주장을 조금 순화시켜서 적용하고자 한다. 공감에만 의지하지 말자. 내가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부분에도 동일한 관심이 필요한 영역이 있다는 것을 늘 인지하자. 공감과 계산을 병행하자.